1982년 1월 26일에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MBC 청룡 야구단이 창단되었다. 1983년 후기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전기 리그 우승 팀인 해태 타이거즈에게 1무 4패로 패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86년에 정규시즌 4위를 기록한것 이외에는 승률 5할대 넘었던 시즌이 없었고, 플레이오프 진출 경력이 없었다.
1989년 12월 14일 MBC 노·사간 합의에 의하여 MBC 청룡 야구단을 매각하기로 의결했고, 1990년 1월 18일, 럭키금성그룹에 130억 원에 인수되어 LG 트윈스로 창단되었다.
[편집]창단과 1990년
1990년 MBC 청룡을 인수받아 창단했다. LG 트윈스의 초대 감독은 MBC 청룡의 마지막 감독으로 부임한 지 약 2개월이 된 백인천이었다. 창단 첫해 LG 트윈스는 신인 포수 김동수와 베테랑 노찬엽, 김상훈 등이 타선에서 핵심으로 활약했었고, 투수에서는 김용수, 정삼흠이 활약했다. 1990년 창단 첫 해 LG 트윈스는 정규시즌 1위를 기록하여 한국시리즈에 직행했고,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4전 전승하여 그 해 바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는 LG 트윈스의 당시 '신바람 야구'에서 시작되어 붐으로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편집]1991년~1993년
[편집]1994년~1998년
이광환 감독 특유의 스타일인 '자율 야구' 아래에서 1994년에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예 3인방과 좌투수 '야생마' 이상훈, 마무리 투수 김용수 등 대활약에 힘입어 81승 45패 (승률 0.643)으로 2위 태평양 돌핀스를 무려 11.5게임차로 밀어내며 정규 리그 1위를 확정짓는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3전 전승으로 격파한 태평양 돌핀스와 가진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 연장 11회말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을 통한 승리를 시작으로 내리 4연승으로 달리면서 두 번의 우승을 모두 시리즈 스코어 4승으로 우승하는 진기록을 세우면서 구단 2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듬해 1995년에도 OB 베어스에 0.5게임차 뒤진 2위로 포스트 시즌에 합류하며 우승을 노렸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시리즈 스코어 2승 4패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후 1996년 정규 시즌 7위에 그치며 이광환 감독이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수석코치 천보성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97년에는 이병규와 임선동, 차명석 등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다. 포스트 시즌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를 상대로 승리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삼성 라이온즈를 맞게 되었고, 서용빈의 활약 등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으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1승 4패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1998년에도 정규 리그 3위를 마크하며 포스트 시즌에서 OB 베어스,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으며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으나 이무렵 LG 트윈스 선수단들은 체력이 지칠 대로 지쳐 있을 때였다. 결국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에게 시리즈 스코어 2승 4패의 패배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신바람 야구'라 불렸던 황금기를 마감하게 된다.
[편집]1999년~2002년
1999년 매직 리그, 드림 리그로 나뉘어 양대 리그 체제의 출범에 따라 LG 트윈스는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와 함께 매직 리그에 속하며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였지만, 삼성과 한화에게 큰 경기차로 밀리며 매직리그 3위에 그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천보성 감독이 물러나게 된다. 뒤이어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출신 이광은 감독이 취임하며 새로운 시즌을 준비한다.
이듬해 2000년 시즌, 67승 3무 63패(승률 0.515)를 기록하며 매직리그 1위에 올라 플레이오프에 다시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드림리그 2위였던 두산 베어스에게 시리즈 스코어 2승 4패로 무릎을 꿇으며 다시 한 번 시즌을 마감하고 만다. 2001년 시즌부터 다시 양대 리그가 통합되면서 단일 리그로 진행되었으나 LG 트윈스는 시즌 내내 부진을 겪었다. 시즌 초 이광은 감독을 해임하고 시즌 전 2군 감독으로 불러왔던 김성근을 1군 감독 대행으로 올려 시즌을 치르는 강수를 두었으나 정규 시즌 6위에 그치고 말았다. 시즌 후 김성근이 LG 트윈스의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2002년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서 66승 6무 61패를 기록하며 2경기 차이로 두산 베어스를 누르고 4위로 포스트 시즌에 턱걸이하게 된다. 하지만, 준 플레이오프에서 최동수의 활약으로 현대를 시리즈 스코어 2승 0패, 플레이오프에서 신인 외야수 박용택의 활약으로 KIA를 시리즈 스코어 3승 2패로 누르며 1998년 이후 4년만에, 4위 팀으로는 통산 3번째로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한다. 삼성을 꺾었던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삼성 라이온즈와 리턴 매치를 갖게 되었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LG 트윈스는 시리즈를 비교적 잘 이끌어 나가며 승부를 6차전으로 넘기게 되어 승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지친 데다가 불펜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고, 대구에서 열렸던 6차전에서는 9회말까지 9:6으로 유리하게 앞서 나가다가 9회말 이상훈이 이승엽에게 3점 동점 홈런을 맞고, 구원 등판한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백투백 솔로 끝내기 홈런을 맞으면서 삼성 라이온즈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헌납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는 양 팀의 알 수 없었던 경기 흐름 때문에 많은 야구 팬들에게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되는 시리즈다.[2] 하지만, 예상 외의 좋은 성과를 이룬 김성근 감독의 유임이 확실해 보였으나, 어윤태 당시 단장과 럭키회가 신바람 야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해임하며 좋지 않은 마무리를 보이고 만다. 이후 LG 트윈스는 급격히 내리막길로 치닫았다. 이를 두고 "김성근의 저주"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3]
[편집]2003년~2006년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다는 것과 LG의 팀 컬러와 감독의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면서 팀 성적이 다시 급격히 추락하게 된다.
2003년에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이광환 감독을 복귀시키며 야심차게 우승을 노렸다. 에이스 이승호의 활약을 필두로 시즌 중반 때만 해도 상위권을 유지해 오다가 중후반 무렵 가면서 점점 떨어져 갔고 결국 정규리그 6위에 그치며 이광환 감독은 2군 감독으로 강등되었고, 2004년에 후임으로 이순철 감독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순철 감독 시절 LG 트윈스는 팬들이 기대했던 것 이하로 크게 부진하였고 일정한 야구 스타일을 보여 주지 못해 계속해서 추락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2004년, 2005년 6위, 2006년 최하위 8위에 그치며 한계를 절감한다. 특히나 오랫동안 팀을 이끌었던 유지현, 김재현, 이상훈 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구단과의 갈등으로 차례로 팀을 떠났으나 팀에서 별다른 인재들이 나오지 않은 것이 큰 타격이 되었다. 이순철 감독은 2006년 시즌 중 물러났다.
FA로 영입하였던 홍현우는 먹튀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2004년 11월에 계약이 끝난 후 KIA 타이거즈로 2:2 트레이드되었고, 이 트레이드 때 같이 간 중견수 이용규는 트레이드된 이후 KIA 타이거즈의 테이블 세터로 맹활약하여 LG에게는 큰 마이너스가 되었다.
2005년 시즌 후 KIA 타이거즈와 또 한 차례 3:3 트레이드를 단행했으나 양 팀 모두 별다른 이득을 내지 못했고, 이 트레이드 상대 선수들 중 트레이드된 후 곧바로 상무에 입대하여 병역을 마친 서동욱만이 뒤늦게 멀티플레이어로써 빛을 보았다.
[편집]2007년~2009년
절치부심한 LG 프런트는 2006년 시즌이 끝난 뒤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이자 현대 유니콘스에서 4회 우승을 이룬 김재박 감독을 영입하고, 두산 베어스에서 투수 박명환을 영입해 오면서 새롭게 시즌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준비와 함께 이대형, 그리고 급성장한 조인성 등의 활약과 함께 삼성과 막판 4강 경쟁을 벌이는 듯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으나, 또 다시 5위에 그치며 가을 야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2007 시즌을 마치게 됐다.
그렇게 맞은 2008 시즌은 작년 팀을 이끌었던 박명환의 부상, 돌아온 박용택과 거액 FA 계약을 체결했던 조인성의 부진과 맞물리면서 시즌 중반 용병으로 영입된 투수 크리스 옥스프링과 1루수 로베르토 페타지니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46승 80패(승률 0.365)에 그치며 불과 2년만에 치욕적인 8위를 다시 경험한다.
2009 시즌, 또다시 절치부심으로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하던 이진영과 히어로즈에서 뛰던 정성훈을 영입하며 한 해를 준비한 LG는 시즌 한 때 강력한 타력을 바탕으로 2위까지 치고 오르며 기세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용병 크리스 옥스프링의 뜻밖의 부상과 급격한 투수진 붕괴를 이겨내지 못하고 또다시 7위를 기록하며 부진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 와중박용택이 분전하며 타격왕을 차지하나,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2009년 시즌이 마감된 후 큰 기대를 모으며 취임했던 김재박 감독은 별 성과 없이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물러났다. 특히 2009년 김상현의 트레이드는 LG 트윈스에게 이용규의 트레이드와 더불어 뼈아픈 트레이드가 되었다.
[편집]2010년~현재
김재박 감독이 성적 부진 및 계약 기간 만료로 물러난 뒤 당시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을 맡았던 박종훈 감독을 영입한 LG는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서 넥센 히어로즈의 외야수 이택근을 영입했고 넥센 히어로즈에서 방출된 좌투수 이상열을 좌완 불펜 강화 차원에서 영입하여 2010년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시즌 개막과 동시에 여러 잡음이 발생하게 되는데, 4월 2일 투수 이형종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박종훈 감독을 비난하는 글을 올려 파문이 일었고, 에이스 봉중근의 부인이 봉중근이 2군행을 통보받자 그의 미니홈피에 박종훈감독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형종은 5월 16일 잠실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해 5이닝 2실점으로 프로 데뷔 첫 선발승을 신고했으나, 이후 부상으로 2군에 다시 내려가 또 다시 잡음을 일으킨 뒤 8월 10일에 임의탈퇴 공시되었다. 7월에는 투수 서승화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발언 등 안팎으로 홍역을 치른 LG는 SK 와이번스와의 트레이드로 투수 박현준, 김선규, 포수 윤상균의 영입 및 그 해 맹타를 휘두르며 골든 글러브를 받은 포수 조인성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그 해 57승 71패 5무(승률 .429)로 6위에 그치면서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2011년 LG는 시즌 초반 잠깐이지만 1위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에이스 봉중근이 팔꿈치 부상으로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어 시즌을 마감했지만, 선발 투수 빅3라 불리는박현준과 레다메스 리즈, 벤자민 주키치의 활약으로 8개 구단 중 30승에 선착했고, 승패마진이 +10까지 올려놓았다. 그러나, 6월 17일 잠실 SK전에서 마무리로 등판한 고졸 신인 투수 임찬규가 9회초 2사 후 밀어내기 4실점으로 역전패 당한 이후 페이스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7월 21일 목동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3연전을 모두 패하면서 승패마진이 0으로 추락하면서 시즌 전반기를 마치게 된다. 그 해 유난히 넥센 히어로즈만 만나면 치열한 경기가 펼쳐져서 엘 클라시코를 본뜬 LG 트윈스와 넥센 히어로즈의 새로운 서울 더비를 나타내는 신조어인 엘 넥라시코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7월 31일 트레이드 마감 시한을 3시간 남기고 넥센 히어로즈와의 트레이드로 투수 심수창과 내야수 박병호를 내주고 투수 송신영과 김성현을 영입하여 분위기 반전을 꾀했으나,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8월 3일 문학 SK전에서 끝내기 역전패를 당한 이후 LG는 5위로 떨어졌고, 9월 24일 잠실 SK전 패배로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게 됐다. 이는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일이다. 한편 시즌 초 투수 오상민이 사적인 잡음을 일으켜 일찌감치 웨이버 공시되었고, 8월에는 투수 이범준이 투수들이 많이 들어와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자신의 트위터에 불만을 표시했고, 시즌 후 서승화가 또 다시 온라인에서 잡음을 일으켜 선수단 내부가 여전히 어수선했다. 서승화는 시즌 후 방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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