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단 과정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출범 당시 대전·충청권을 연고지로 한 OB 베어스는 1984년 시즌을 마치고 연고지를 서울특별시로 이전한다. 이는 한국야구위원회와 OB 구단 사이에 프로 야구 출범 당시부터 3년 후 연고지를 서울특별시로 이전하겠다는 사전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5년 한국 프로 야구 리그 참가를 희망한 한화그룹에서 1월 15일 창단 준비 위원회를 발족시킨다. 다음 날인 1월 16일 한국 야구 위원회로부터 제 7구단으로 승인받게 되고 3월 11일 '(주)빙그레 이글스 야구단'이 설립된다. 그 해에는 2군 리그에 참가하였다.
1986년 3월 8일과 9일, 대전과 청주에서 빙그레 이글스 창단식을 개최한다. 그 해 처음으로 1군 리그에 참가하였지만 신생 구단의 한계와 얕은 선수 층으로 리그 7위를 기록한다.
[편집]빙그레 이글스
[편집]1985년 창단 ~ 1987년 (배성서 감독 시대)
[편집]1985년
한국 프로 야구의 제 7구단으로 창단하였다. 창단 감독은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던 배성서 감독이었다. 창단 원년, 구단 구성 선수 전력층이 빈약한 관계로 삼성 라이온즈등 타 구단에서 현금 트레이드 및 타 구단의 선수 지명권을 양도받아 많은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공개 트라이아웃도 열었다. 1985년에는 2군 리그에 참가하였고, 198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1군 리그에 참가함으로써 한국 프로 야구 리그에서 뛰게 된다. 처음으로 1군 리그에 참가한 1986년 상대적으로 얇은 선수진과 경험 부족 등의 신생 팀의 한계로 31승 76패 1무 승률 0.290을 기록하면서 7개 구단 중 최하위를 기록한다. 이러한 얇은 선수층은 2009년에 8개 구단 체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 이후 다시 이글스에 큰 문제를 안기게 된다.
[편집]1988년 ~ 1993년 (김영덕 감독 시대)
[편집]1988년
1988년에 3년 계약 기간이 만료된 배성서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김영덕 감독을 영입하여 정규 시즌을 2위로 마감한 빙그레 이글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3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창단 이래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정규 리그 1위 팀 해태 타이거즈와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내리 3경기를 지게 된다. 그 후 2경기를 잡고 분위기를 타는 듯 했으나, 결국 6차전에서 져서 2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문다.
[편집]1989년
창단 4년만에 빙그레 이글스는 6할의 승률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 우승을 한다.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태평양 돌핀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이기고 올라왔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태평양을 잡았다. 1988년에 이어 또 다시 빙그레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만났다. 1차전에서는 빙그레가 에이스 이상군의 호투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내리 4경기를 모두 져서,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문다.
[편집]1990년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2패를 당하여, 포스트 시즌을 마감했다. 정규리그 4위였던 삼성이 빙그레(3위), 해태(2위)를 연달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빙그레는 최종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편집]1991년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2위에 올랐다.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올라온 삼성 라이온즈와 플레이오프에서 만났다. 결과는 3승 1패로 빙그레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갔다.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우승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3번째로 만났다. 하지만 단 한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4:0으로 져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렀다.
[편집]1992년
빙그레 이글스는 투-타 및 팀 조직력이 완벽했다. 6할이 넘는 승률과 팀 홈런 146개를 기록하였으며, 신인 정민철은 14승, 송진우는 19승, 이상군도 10승을 했고, 팀의 주축 거포장종훈은 무려 41개의 홈런을 날렸다. 이정훈은 타율 0.360라는 고타율을 기록하고 25개의 홈런을 날렸으며, 이강돈도 0.320의 타율과 13개의 홈런을 날렸다.
정규 시즌을 우승한 빙그레 이글스는 삼성과 해태를 꺾고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났다. 1차전과 2차전에서 패배한 빙그레는 3차전을 이겼지만, 롯데 염종석의 활약으로 4차전도 지고 5차전에서도 패배하면서, 시리즈 전적 4:1로 롯데 자이언츠가 8년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1992년 정규시즌은 이글스 팬들에게는 아쉬운 해였다. 투-타 걸쳐서 완벽했던 시즌이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도 아니였고, 이번에는 우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는 강했다. 이로써 빙그레의 4번째 한국시리즈 첫 우승 도전도 실패했다.
[편집]1993년
이 해 빙그레 이글스는 부진에 시달렸다. 주축 외야수 이정훈 선수가 부상을 당했고, 장종훈 선수도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었다. 베테랑 투수 한희민은 김영덕 감독과 갈등을 빚어 삼성 라이온즈로 박철희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었고 다른 투수들은 부진했다. 이 시즌 동안은 프로 2년차를 맞이했던 투수 정민철이 13승을 거두며 홀로 고군분투했다.1993년에는 좌완 투수 구대성 선수가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해이기도 했지만 구대성은 기대와 달리 프로 데뷔 첫 해에 부진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부진했다. 정규 시즌 5위로 마감한 빙그레 이글스는 이제 더 이상 '빙그레'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시즌 후 그 해 11월 9일 모그룹명을 팀명으로 쓰기로 하고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을 바꾸었다.(이후 빙그레는 한화그룹에서 계열 분리된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도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 빙그레를 떠나게 되어 김영덕 감독의 퇴장과 함께 빙그레의 시대도 끝났다.
[편집]한화 이글스
[편집]1994년 ~ 1998년 (강병철 감독 시대)
새롭게 구단명을 바꾸고 강병철 감독이 사령탑을 맡았지만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한화는 5년 동안 두 차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데 그쳤다. 1994년 길배진, 1995년 신재웅 등 1차 지명 선수가 거듭 실패하면서 세대교체 작업도 여의치가 않았다. 다행인 것은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향후 팀의 새로운 주축이 될 선수들을 대거 지명했다는 점이었다. 그 해 한화는 신인 지명에서 이영우, 송지만, 김수연, 임수민, 이상열, 심광호, 홍원기 등을 선택하며 세대교체의 물꼬를 트는 데 성공했다. 그 중 임수민, 이영우, 송지만은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였다. 여기에 마운드에서는 기존의 송진우와 정민철이 좌·우 에이스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데뷔 첫 해 실망스러웠던 투수 구대성이 ‘대성불패’로 거듭났다.
[편집]1998년 ~ 2000년 (이희수 감독 시대)
[편집]1998년
강병철 감독이 성적 부진의 이유로 올스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7월 9일에 경질당했다. 강병철 감독은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한대화 감독과 더불어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경질된 감독이다. 북일고등학교 감독 출신 수석코치 이희수가 감독 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치렀고, 시즌 후 정식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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