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화 이전
롯데 자이언츠 야구단은 1975년 5월 6일 서울에서 창단되어 실업야구연맹에 10번째로 가입한 구단이었다. 미래의 프로 야구단을 지향하여 롯데 자이언츠라는 구단 명을 사용하였다. 창단 감독은 김동엽이었다.
- 1976년 춘계리그 성적 5승 1무 3패로 육군팀과 공동 3위, 하계리그 성적 7승 1무 1패로 우승, 추계리그 성적 5승 2무 2패로 우승
- 1977년 부산시장기 준우승, 백호기 전국선수권 준우승
- 1978년 후기리그 우승, 코리언 시리즈 준우승 (78년 부터 코리언 시리즈 제도가 생김)
- 1979년 코리언 시리즈 우승, 1차리그 준우승, 5차리그 준우승, 서라벌기 준우승[3]
- 1981년 코리언 시리즈 우승, 전기리그 우승
[편집]프로화 이후
[편집]프로 구단 출범 과정
실업 야구단이던 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 2월 22일 부산과 경상남도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단으로 전환했다. 초대 감독은 박영길이었다. 구단주는 애초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창단하고자 했으나 마지못해 부산직할시를 선택했다.[4] 이는 해태를 제외한 전 구단이 서울 연고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MBC는 프로 야구 계획 단계에서 이미 서울 연고를 확고히 하고 있었고, 롯데의 연고지는 처음부터 부산-경남이었으며, 롯데의 대안으로 부산-경남 연고 구단이 유력시되던 럭키금성그룹은 처음부터 야구단 창단을 거부했다. 럭키금성은 이후 MBC를 인수하여 참가하게 된다.
[편집]1982년 시즌
프로야구 첫 경기는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로 14-2로 승리했다. 그러나 당해 시즌 승률 .388을 기록하며 6개 팀 중 5위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프로 원년 롯데 자이언츠의 부진은 최동원, 유두열, 심재원 국가대표 주전 3명이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로 롯데 입단을 1년 미루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모처럼 한국이 유치한 1982년의 제27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를 맞아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한 대한야구협회의 요청으로, 7명의 선수가 프로 전향을 유보하고 실업팀 등에 남았고, 그중 3명이 롯데 소속이었으며 3명 모두 주전이었다. 또한 국가대표 4번 타자였던 김용희가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였다.
참고로 당시 국가대표 차출을 이유로 프로입단을 연기한 선수는 심재원, 유두열, 최동원, 김재박, 이해창, 임호균 등 6명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소속팀이던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가 프로로 전향하자 다른 실업팀인 '한국전력공사'로 이적까지 했다.
[편집]1983년 시즌
[편집]V1(1984년 시즌)
1984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첫 우승을 한 시즌으로 이해 전기리그에서는 6개 팀 중 4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후기리그에서 8월 11일부터 시작된 홈 5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1위로 올라섰다. 이때, 최동원이 4게임에 나와 2승 2세이브를 올리는 활약을 했다.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 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는 최동원의 역투(7전 4선승제 중 5경기 등판 4승1패)와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으로 시리즈 전적 4승 3패로 우승했다. 최동원은 이해 정규리그 MVP와 27승으로 다승왕를 차지했으며 탈삼진 223개로 역대 탈삼진 1위라는 기록도 세웠다.
[편집]1985년 ~ 1991년 시즌
1985년 0.536의 승률로 전체 2위의 성적을 내지만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전기/후기 리그는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 86년에는 5위를 기록하였으며 87년 3위, 88년 3위, 89년에는 7위, 90년에는 6위를 차지하였다. 91년에는 4위를 차지하였는데, 이해에 롯데는 1,001,920명의 관중을 동원,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홈경기 100만 관중을 돌파하였다. [5] 롯데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6년 연속 프로야구 관중 동원 1위를 기록하였다. [5]
[편집]V2(1992년 시즌)
1992년에 정규시즌을 3위로 마친 롯데 자이언츠는 준 플레이오프 2차전(對 삼성, 4-0), 플레이오프 5차전(對 해태, 10-4), 한국시리즈 5차전(對 빙그레, 4-2)을 연속으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남두오성이라고 불리는 5명의 3할 타자(김민호, 김응국, 이종운, 박정태, 전준호)를 배출했고, 윤학길과 염종석이 각각 17승을 따내었다. 고졸 신인으로 17승을 따내고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염종석은 신인왕과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롯데 자이언츠는 홈경기 누적 관중 1,209,632명, 평균 관중 19,201명을 기록하여 2년 연속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하였다. [5]
[편집]1993년 ~ 1998년 시즌
93~94년은 6위를 기록하였다. 95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으나 OB 베어스에 3:4로 패하였다. 95년 1,180,576명의 홈경기 관중을 기록하여 3회에 걸쳐 100만 관중 달성을 기록하였다.[5] 96년은 5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고 97년과 98년에 최하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편집]1999년 시즌
1999년 리그 2위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에 몰렸으나, 5, 6, 7차전을 모두 6-5 한 점 차로 승리하였다.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정지은 7차전은 프로 야구 사상 최고의 명승부 가운데 하나로 회자된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한화 이글스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마해영이 .372로 역대 타격 5위의 기록을 세우며 타격왕에 올랐고, 박정태는 31게임 연속 안타의 기록을 수립했다. 스위치 히터 펠릭스 호세가 좌우타석 홈런, 연속게임 만루홈런과 1만번째 홈런의 주인공이 되는 진기록도 보여 주었다. 1999년 롯데는 팀평균자책점과 팀타율 모두 1위를 기록하였으며 특히 팀 타율 .291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진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하지 못하였다.(역대 7번 중 1999년 롯데를 제외하고 모두 우승) [6]
[편집]2000년 시즌
2000년에는 양대 리그제가 시행되었던 때로 롯데 자이언츠는 매직리그 2위, 삼성 라이온즈는 드림리그 3위를 기록하였으나 삼성의 승률이 더 높아 양 팀 간 3전 2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렀다. 1차전 당시 마산에서 최초로 포스트 시즌 홈 경기를 가졌다. 0-2, 4-2, 1-5로 1승 2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고 최종 순위에는 5위로 기록되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2007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한편 2000년 4월 18일 잠실 LG전 도중 포수 임수혁이 2루로 가다가 갑자기 쓰러지며 식물인간 판정을 받아 롯데 구단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임수혁은 이후 10년간의 투병 끝에 2010년 2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편집]2001년 ~ 2007년 시즌, 롯데의 암흑기
2001년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후임인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적인 ‘암흑기’가 오게 된다. 특히 대표적인 1번 타자 감이었던 김주찬에게 거포형으로 바꾸기 위해 홈런 스윙을 가르치고 이대호를 전근대적인 훈련법으로 무릎 부상을 입게 했으며 손민한을 트레이드 하려 하는등 1년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가 행한 수많은 만행들이 7년간의 롯데 자이언츠 성적이 부진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1년부터 2007년 까지 롯데 자이언츠는 년도 순으로 8 - 8 - 8 - 8 - 5 - 7 - 7위를 기록하여 7년간이나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해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7] 이 기간 중 롯데 자이언츠가 기록한 2001년부터 2004년까지의 4년 연속 최하위는 한국 프로 야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8]
이 기간 중 펠릭스 호세 선수는 역대 출루율 1위, 2000년대 조정OPS 1위의 기록을 세웠다. [7] 2005년에는 시즌 초반 5연승과 함께 1위로 출발하였으나 여름 이후부터 처지기 시작하여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한편 에이스 손민한은 18승에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여 리그MVP를 수상하였다. 2006년 시즌 이대호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였다.
[편집]2008년 시즌
미국 메이저 리그 출신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2008년 롯데 자이언츠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였다. 9월 2일에는 팀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인 11연승을 기록하였다. (기간 : 2008년 7월 27일 사직 한화전 ~ 2008년 9월 2일 사직 LG전) 이 여세를 몰아 2008년 9월 16일에는 2000년 이후 8년만에 준 플레이오프행을 확정지었다.[9]
이를 보답이라도 하듯 부산과 마산 홈 경기에는 무려 22차례나 입장권이 매진되었고, 전국의 야구장마다 롯데 팬들이 모여들며 응원을 펼쳤다. 그리고 그해 9월 홈 마지막 경기인KIA전을 앞두고 식전 행사에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4강에 가면 "부산 갈매기"를 부르겠다는 약속에 따라 허남식 부산광역시장과 함께 부산갈매기를 부르며 성원에 보답하였다. 아울러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이날 명예 부산 시민증을 받았다. 그러나 팀은 포스트 시즌 경험이 부족한 탓에, 준 플레이오프 상대인 삼성 라이온즈에게 스윕당하면서 플레이오프행이 좌절되었다.
[편집]2009년 시즌
6월 초까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극적인 상승세를 타면서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듯 하였으나 이후 3연패하여 실패하고, 최종 순위 4위로 기록되었다. 특히 주전선수들과 초반 선발투수들의 잇단 부상들이 6월초까지의 최하위의 원인이었다.
[편집]2010년 시즌
타격에서 다른 팀을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여 롯데 타자를 만나면 몇 명 타자 제외하고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할 정도로 타격에서는 준수했다. 프로야구 최초로 이대호 선수는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분1위를 달성하고(타격, 득점, 최다안타,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9경기 연속홈런 세계신기록(8월 4일 ~ 8월 14일)달성하였다. 불펜 투수진이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타선 덕분에 4위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준플레이오프 2차전을두산을 상대로 2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는 듯 하였으나 믿었던 타선 김주찬, 손아섭, 조성환, 이대호, 홍성흔, 가르시아, 강민호, 전준우, 황재균, 문규현 (이)가 타석에서 침묵을 지키며 3연패 역스윕을 당하여 또다시 2008, 2009년 시즌과 같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많은 팬들의 재계약 지지 운동에도 불구하고 재계약하지 못하였고, 후임 감독으로 고려대학교 감독이던 양승호 감독이 선임되었다.
[편집]2011년 시즌
롯데를 3년 연속 포스트 시즌으로 이끌었던 제리 로이스터를 이어 롯데를 맡은 양승호 감독은 시즌 전반기에 여러가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지명타자 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해 홍성흔을 좌익수로, 불펜진 강화를 위해 고원준을 마무리 투수로 기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손아섭, 김주찬 등의 부상과 용병 투수 브라이언 코리의 퇴출 등으로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시즌 후반기에 부상 선수들이 돌아오고 홍성흔도 제자리를 찾으면서 팀 타격이 살아나 시즌 팀 타율 1위를 차지했다.고원준도 불펜 혹사 논란 끝에 선발 투수로 복귀했다. 특히 전반기에 부진했던 불펜진이 살아났는데, 그중에서 임경완, 강영식, 김사율이 경기 후반부를 잘 마무리했고 김사율은 모처럼 20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조원우 외야 수비코치의 지도로 김주찬, 손아섭의 외야 수비가 많이 향상되어 수비가 안정화된 것도 후반기 상승세의 한 요인이었다.
롯데는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 리그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게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KBO 대회 요강 3조 1항(한국시리즈 우승 구단이 제1위, 준우승 구단이 제2위, 그 이하는 페넌트레이스 승률 순으로 한다)에 따라 최종 순위는 3위가 되었다.
[편집]2012년 시즌
2011년 시즌 종료 후, 롯데는 4명의 주축 선수가 팀을 떠났다. 자유 계약 신분을 획득한 간판 1루수 이대호와 사이드암 투수 임경완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이대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일본 프로 야구 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하여 그 해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임경완은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또한 좌완 에이스 장원준과 백업 포수 장성우가 경찰청으로 입대하며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에서 좌완 투수 이승호와 메이저 리그 진출을 준비하다 메디컬 테스트 문제로 돌아온 우완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을 영입해 임경완이 떠난 대신 투수진을 크게 보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호는 잔부상과 겨울훈련 부족으로 인한 구위 부진으로 제 몫을 하지 못했고, 시즌 후 보호선수 제외 및 NC 다이노스의 전력보강 선수로 지명되어 팀을 떠났다. 정대현은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인해 8월에서야 복귀하였다.
외국인 용병으로는 라이언 사도스키가 2010년부터 3시즌 연속 롯데 유니폼을 입었고, 장원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좌완 투수 셰인 유먼을 영입했다. 유먼은 전 롯데 선수였던 브라이언 코리와 2011년 대만 프로 야구 라미고 몽키스에서 뛴 경험이 있으며, 코리로부터 롯데와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유먼은 롯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으며 장원준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는데 성공했다.
시즌 초반 롯데는 셰인 유먼, 이용훈, 김성배, 이명우, 최대성 등 탄탄한 투수진과 짜임새 있는 타선을 앞세워 선두권을 질주했고, 특히 60경기 이상 치른 시점이던 6월에도 단독 선두에 올랐다. 60경기 이상 치른 시점에서 롯데가 중간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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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야구단은 1975년 5월 6일 서울에서 창단되어 실업야구연맹에 10번째로 가입한 구단이었다. 미래의 프로 야구단을 지향하여 롯데 자이언츠라는 구단 명을 사용하였다. 창단 감독은 김동엽이었다.
- 1976년 춘계리그 성적 5승 1무 3패로 육군팀과 공동 3위, 하계리그 성적 7승 1무 1패로 우승, 추계리그 성적 5승 2무 2패로 우승
- 1977년 부산시장기 준우승, 백호기 전국선수권 준우승
- 1978년 후기리그 우승, 코리언 시리즈 준우승 (78년 부터 코리언 시리즈 제도가 생김)
- 1979년 코리언 시리즈 우승, 1차리그 준우승, 5차리그 준우승, 서라벌기 준우승[3]
- 1981년 코리언 시리즈 우승, 전기리그 우승
[편집]프로화 이후
[편집]프로 구단 출범 과정
실업 야구단이던 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 2월 22일 부산과 경상남도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단으로 전환했다. 초대 감독은 박영길이었다. 구단주는 애초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창단하고자 했으나 마지못해 부산직할시를 선택했다.[4] 이는 해태를 제외한 전 구단이 서울 연고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MBC는 프로 야구 계획 단계에서 이미 서울 연고를 확고히 하고 있었고, 롯데의 연고지는 처음부터 부산-경남이었으며, 롯데의 대안으로 부산-경남 연고 구단이 유력시되던 럭키금성그룹은 처음부터 야구단 창단을 거부했다. 럭키금성은 이후 MBC를 인수하여 참가하게 된다.
[편집]1982년 시즌
프로야구 첫 경기는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로 14-2로 승리했다. 그러나 당해 시즌 승률 .388을 기록하며 6개 팀 중 5위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프로 원년 롯데 자이언츠의 부진은 최동원, 유두열, 심재원 국가대표 주전 3명이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로 롯데 입단을 1년 미루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모처럼 한국이 유치한 1982년의 제27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를 맞아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한 대한야구협회의 요청으로, 7명의 선수가 프로 전향을 유보하고 실업팀 등에 남았고, 그중 3명이 롯데 소속이었으며 3명 모두 주전이었다. 또한 국가대표 4번 타자였던 김용희가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였다.
참고로 당시 국가대표 차출을 이유로 프로입단을 연기한 선수는 심재원, 유두열, 최동원, 김재박, 이해창, 임호균 등 6명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소속팀이던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가 프로로 전향하자 다른 실업팀인 '한국전력공사'로 이적까지 했다.
[편집]1983년 시즌
[편집]V1(1984년 시즌)
1984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첫 우승을 한 시즌으로 이해 전기리그에서는 6개 팀 중 4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후기리그에서 8월 11일부터 시작된 홈 5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1위로 올라섰다. 이때, 최동원이 4게임에 나와 2승 2세이브를 올리는 활약을 했다.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 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는 최동원의 역투(7전 4선승제 중 5경기 등판 4승1패)와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으로 시리즈 전적 4승 3패로 우승했다. 최동원은 이해 정규리그 MVP와 27승으로 다승왕를 차지했으며 탈삼진 223개로 역대 탈삼진 1위라는 기록도 세웠다.
[편집]1985년 ~ 1991년 시즌
1985년 0.536의 승률로 전체 2위의 성적을 내지만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전기/후기 리그는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 86년에는 5위를 기록하였으며 87년 3위, 88년 3위, 89년에는 7위, 90년에는 6위를 차지하였다. 91년에는 4위를 차지하였는데, 이해에 롯데는 1,001,920명의 관중을 동원,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홈경기 100만 관중을 돌파하였다. [5] 롯데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6년 연속 프로야구 관중 동원 1위를 기록하였다. [5]
[편집]V2(1992년 시즌)
1992년에 정규시즌을 3위로 마친 롯데 자이언츠는 준 플레이오프 2차전(對 삼성, 4-0), 플레이오프 5차전(對 해태, 10-4), 한국시리즈 5차전(對 빙그레, 4-2)을 연속으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남두오성이라고 불리는 5명의 3할 타자(김민호, 김응국, 이종운, 박정태, 전준호)를 배출했고, 윤학길과 염종석이 각각 17승을 따내었다. 고졸 신인으로 17승을 따내고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염종석은 신인왕과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롯데 자이언츠는 홈경기 누적 관중 1,209,632명, 평균 관중 19,201명을 기록하여 2년 연속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하였다. [5]
[편집]1993년 ~ 1998년 시즌
93~94년은 6위를 기록하였다. 95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으나 OB 베어스에 3:4로 패하였다. 95년 1,180,576명의 홈경기 관중을 기록하여 3회에 걸쳐 100만 관중 달성을 기록하였다.[5] 96년은 5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고 97년과 98년에 최하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편집]1999년 시즌
1999년 리그 2위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에 몰렸으나, 5, 6, 7차전을 모두 6-5 한 점 차로 승리하였다.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정지은 7차전은 프로 야구 사상 최고의 명승부 가운데 하나로 회자된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한화 이글스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마해영이 .372로 역대 타격 5위의 기록을 세우며 타격왕에 올랐고, 박정태는 31게임 연속 안타의 기록을 수립했다. 스위치 히터 펠릭스 호세가 좌우타석 홈런, 연속게임 만루홈런과 1만번째 홈런의 주인공이 되는 진기록도 보여 주었다. 1999년 롯데는 팀평균자책점과 팀타율 모두 1위를 기록하였으며 특히 팀 타율 .291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진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하지 못하였다.(역대 7번 중 1999년 롯데를 제외하고 모두 우승) [6]
[편집]2000년 시즌
2000년에는 양대 리그제가 시행되었던 때로 롯데 자이언츠는 매직리그 2위, 삼성 라이온즈는 드림리그 3위를 기록하였으나 삼성의 승률이 더 높아 양 팀 간 3전 2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렀다. 1차전 당시 마산에서 최초로 포스트 시즌 홈 경기를 가졌다. 0-2, 4-2, 1-5로 1승 2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고 최종 순위에는 5위로 기록되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2007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한편 2000년 4월 18일 잠실 LG전 도중 포수 임수혁이 2루로 가다가 갑자기 쓰러지며 식물인간 판정을 받아 롯데 구단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임수혁은 이후 10년간의 투병 끝에 2010년 2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편집]2001년 ~ 2007년 시즌, 롯데의 암흑기
2001년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후임인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적인 ‘암흑기’가 오게 된다. 특히 대표적인 1번 타자 감이었던 김주찬에게 거포형으로 바꾸기 위해 홈런 스윙을 가르치고 이대호를 전근대적인 훈련법으로 무릎 부상을 입게 했으며 손민한을 트레이드 하려 하는등 1년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가 행한 수많은 만행들이 7년간의 롯데 자이언츠 성적이 부진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1년부터 2007년 까지 롯데 자이언츠는 년도 순으로 8 - 8 - 8 - 8 - 5 - 7 - 7위를 기록하여 7년간이나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해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7] 이 기간 중 롯데 자이언츠가 기록한 2001년부터 2004년까지의 4년 연속 최하위는 한국 프로 야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8]
이 기간 중 펠릭스 호세 선수는 역대 출루율 1위, 2000년대 조정OPS 1위의 기록을 세웠다. [7] 2005년에는 시즌 초반 5연승과 함께 1위로 출발하였으나 여름 이후부터 처지기 시작하여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한편 에이스 손민한은 18승에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여 리그MVP를 수상하였다. 2006년 시즌 이대호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였다.
[편집]2008년 시즌
미국 메이저 리그 출신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2008년 롯데 자이언츠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였다. 9월 2일에는 팀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인 11연승을 기록하였다. (기간 : 2008년 7월 27일 사직 한화전 ~ 2008년 9월 2일 사직 LG전) 이 여세를 몰아 2008년 9월 16일에는 2000년 이후 8년만에 준 플레이오프행을 확정지었다.[9]
이를 보답이라도 하듯 부산과 마산 홈 경기에는 무려 22차례나 입장권이 매진되었고, 전국의 야구장마다 롯데 팬들이 모여들며 응원을 펼쳤다. 그리고 그해 9월 홈 마지막 경기인KIA전을 앞두고 식전 행사에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4강에 가면 "부산 갈매기"를 부르겠다는 약속에 따라 허남식 부산광역시장과 함께 부산갈매기를 부르며 성원에 보답하였다. 아울러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이날 명예 부산 시민증을 받았다. 그러나 팀은 포스트 시즌 경험이 부족한 탓에, 준 플레이오프 상대인 삼성 라이온즈에게 스윕당하면서 플레이오프행이 좌절되었다.
[편집]2009년 시즌
6월 초까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극적인 상승세를 타면서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듯 하였으나 이후 3연패하여 실패하고, 최종 순위 4위로 기록되었다. 특히 주전선수들과 초반 선발투수들의 잇단 부상들이 6월초까지의 최하위의 원인이었다.
[편집]2010년 시즌
타격에서 다른 팀을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여 롯데 타자를 만나면 몇 명 타자 제외하고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할 정도로 타격에서는 준수했다. 프로야구 최초로 이대호 선수는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분1위를 달성하고(타격, 득점, 최다안타,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9경기 연속홈런 세계신기록(8월 4일 ~ 8월 14일)달성하였다. 불펜 투수진이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타선 덕분에 4위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준플레이오프 2차전을두산을 상대로 2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는 듯 하였으나 믿었던 타선 김주찬, 손아섭, 조성환, 이대호, 홍성흔, 가르시아, 강민호, 전준우, 황재균, 문규현 (이)가 타석에서 침묵을 지키며 3연패 역스윕을 당하여 또다시 2008, 2009년 시즌과 같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많은 팬들의 재계약 지지 운동에도 불구하고 재계약하지 못하였고, 후임 감독으로 고려대학교 감독이던 양승호 감독이 선임되었다.
[편집]2011년 시즌
롯데를 3년 연속 포스트 시즌으로 이끌었던 제리 로이스터를 이어 롯데를 맡은 양승호 감독은 시즌 전반기에 여러가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지명타자 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해 홍성흔을 좌익수로, 불펜진 강화를 위해 고원준을 마무리 투수로 기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손아섭, 김주찬 등의 부상과 용병 투수 브라이언 코리의 퇴출 등으로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시즌 후반기에 부상 선수들이 돌아오고 홍성흔도 제자리를 찾으면서 팀 타격이 살아나 시즌 팀 타율 1위를 차지했다.고원준도 불펜 혹사 논란 끝에 선발 투수로 복귀했다. 특히 전반기에 부진했던 불펜진이 살아났는데, 그중에서 임경완, 강영식, 김사율이 경기 후반부를 잘 마무리했고 김사율은 모처럼 20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조원우 외야 수비코치의 지도로 김주찬, 손아섭의 외야 수비가 많이 향상되어 수비가 안정화된 것도 후반기 상승세의 한 요인이었다.
롯데는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 리그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게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KBO 대회 요강 3조 1항(한국시리즈 우승 구단이 제1위, 준우승 구단이 제2위, 그 이하는 페넌트레이스 승률 순으로 한다)에 따라 최종 순위는 3위가 되었다.
[편집]2012년 시즌
2011년 시즌 종료 후, 롯데는 4명의 주축 선수가 팀을 떠났다. 자유 계약 신분을 획득한 간판 1루수 이대호와 사이드암 투수 임경완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이대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일본 프로 야구 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하여 그 해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임경완은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또한 좌완 에이스 장원준과 백업 포수 장성우가 경찰청으로 입대하며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에서 좌완 투수 이승호와 메이저 리그 진출을 준비하다 메디컬 테스트 문제로 돌아온 우완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을 영입해 임경완이 떠난 대신 투수진을 크게 보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호는 잔부상과 겨울훈련 부족으로 인한 구위 부진으로 제 몫을 하지 못했고, 시즌 후 보호선수 제외 및 NC 다이노스의 전력보강 선수로 지명되어 팀을 떠났다. 정대현은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인해 8월에서야 복귀하였다.
외국인 용병으로는 라이언 사도스키가 2010년부터 3시즌 연속 롯데 유니폼을 입었고, 장원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좌완 투수 셰인 유먼을 영입했다. 유먼은 전 롯데 선수였던 브라이언 코리와 2011년 대만 프로 야구 라미고 몽키스에서 뛴 경험이 있으며, 코리로부터 롯데와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유먼은 롯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으며 장원준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는데 성공했다.
시즌 초반 롯데는 셰인 유먼, 이용훈, 김성배, 이명우, 최대성 등 탄탄한 투수진과 짜임새 있는 타선을 앞세워 선두권을 질주했고, 특히 60경기 이상 치른 시점이던 6월에도 단독 선두에 올랐다. 60경기 이상 치른 시점에서 롯데가 중간 순위 1위에 오른 것은 창단 3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롯데는 6월 17일 주전 포수 강민호의 체력 안배를 위해 두산에 신인급 우완 투수 김명성을 내주고 용덕한을 영입했다. 용덕한은 롯데 입단 직후 1군에 즉시 투입되며 강민호와 번갈아 경기에 출장했다.
그러나 롯데는 시즌 내내 잔부상과 부진 때문에 시름을 앓았다. 4번 타자 홍성흔이 각종 잔부상으로 경기를 자주 걸렀고, 주전 유격수 문규현과 톱타자 김주찬도 잔부상에 자주 시달려 박준서, 정훈, 황성용, 이승화 등이 번갈아 가며 라인업을 채웠다. 또한 강민호, 전준우, 황재균 등 핵심 타자들의 활약이 2011년보다 부진해지면서 공격력이 약해졌다.
결국 페넌트레이스를 4위로 마감해 2010년 이후 2년 만에 준 플레이오프부터 포스트시즌을 시작했다. 페넌트레이스 개인 타이틀에서는 손아섭이 158개의 안타를 쳐내 최다 안타 타이틀을 획득했고, 마무리 보직을 맡은 주장 김사율은 34세이브를 기록해 롯데 자이언츠 투수 중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1994년 박동희의 31세이브)
두산 베어스와의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박준서, 용덕한, 문규현 등 그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들이 맹활약하고, 부상에서 회복한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이 호투하면서 3승 1패로 시리즈를 통과한다. 롯데 자이언츠가 준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은 1992년 이후 20년 만이며, 상위 시리즈로 진출한 것은 1999년 이후 13년 만이다.
그러나 SK 와이번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3패로 밀려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후 양승호 감독이 물러나고 권두조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아 아시아 시리즈를 맡은 후 김시진 감독이 새로 취임하였다.위 1위에 오른 것은 창단 3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롯데는 6월 17일 주전 포수 강민호의 체력 안배를 위해 두산에 신인급 우완 투수 김명성을 내주고 용덕한을 영입했다. 용덕한은 롯데 입단 직후 1군에 즉시 투입되며 강민호와 번갈아 경기에 출장했다.
그러나 롯데는 시즌 내내 잔부상과 부진 때문에 시름을 앓았다. 4번 타자 홍성흔이 각종 잔부상으로 경기를 자주 걸렀고, 주전 유격수 문규현과 톱타자 김주찬도 잔부상에 자주 시달려 박준서, 정훈, 황성용, 이승화 등이 번갈아 가며 라인업을 채웠다. 또한 강민호, 전준우, 황재균 등 핵심 타자들의 활약이 2011년보다 부진해지면서 공격력이 약해졌다.
결국 페넌트레이스를 4위로 마감해 2010년 이후 2년 만에 준 플레이오프부터 포스트시즌을 시작했다. 페넌트레이스 개인 타이틀에서는 손아섭이 158개의 안타를 쳐내 최다 안타 타이틀을 획득했고, 마무리 보직을 맡은 주장 김사율은 34세이브를 기록해 롯데 자이언츠 투수 중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1994년 박동희의 31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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