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야구단 ( 1982년 ~ 1983년 )
OB 베어스의 첫 경기는 MBC 청룡과의 경기로 박철순의 4안타 2실점(1자책점) 완투승으로 승리했다.[1] 이후 4월 중순부터 분위기가 반전되어 5월 2일 홈경기에서는 10승 5패로 단독 선두에 나섰다.[2] 이후 9연승 등으로 시즌 4경기를 남겨두고 28승 8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3] 후기리그에서도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으나 9월 29일 대구 삼성 전에서 박철순의 11 2/3이닝 2실점 완투패로 종합 우승에는 실패했다.[4] 그 경기에서, 또한 24승을 거뒀던 박철순이 '요부 추간판 헤르니아'의 디스크 증상으로 한국시리즈 출전이 불투명해졌다.[5]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15회 3-3 무승부로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두 팀은,[6] 다음 날, OB 선발 계형철이 2회 6점을 내주는 등의 투구로 대패를 당했다.[7] 그리고 3차전, 박철순은 국소마취제을 맞으면서[8] 3.1이닝 던지며 OB가 5-3으로 승리했다.[9] 이후 4, 5차천에서 내리 이긴 OB는 6차전에 박철순과 이선희의 선발 맞대결에서 8회까지 3-3 균형이 이어졌지만,[10] 김유동이 9회 만루홈런을 쳐내면서 MVP에 선정되어 4승 1무 1패로 우승을 차지했다.[11]
그러나 1983년 시즌에는 박종훈, 한대화, 장호연, 정선두만을 신인으로 확보했고,[12] 박철순, 선우대영, 강철원 등의 주력 투수와 구천서 등의 야수진도 부상을 당하면서,[13] 결국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 순위가 5위로 하락했다.[14] 그해 10월 14일, 김영덕 감독이 팀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15]
[편집]김성근 감독시대 ( 1984년 ~ 1988년 )
1984년, 새 감독으로 투수 코치였던 김성근이 취임했고, 코치진도 보강되었다.[16] 선수도 재일교포 최일언, 홍신차등을 비롯해 신인 윤석환, 김진욱, 김광림 등을 확보했다.[16]그리고 계형철이 14승, 박상열 12승, 장호연이 평균자책점 1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야수진에서도 부상 공백이 메워지며 9연승으로 치고 나갔다.[14] 그러나 이후 6연패에 빠지며 삼성에게 전기리그를 내주었고, 후기리그에서도 초반에는 선두로 질주했지만, 8월 15일 부터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17] 마지막 두 경기에서 OB는 해태와, 롯데는 삼성과 맞붙었는데, 삼성은 롯데에게 일부러 패하면서 OB는 후기리그도 2위에 머물렀다.[18]
1985년, OB는 연고지를 대전에서 서울 동대문 야구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해, 전기리그는 2위를 기록했으나 후기리그는 5위로 마무리했다. 1986년, OB는 다시 구장을 잠실 야구장으로 옮기고, 전 연고지에는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었다. 그해, 플레이오프 진출권이 달린 롯데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김형석의 동점 홈런과 이후 안타로 4-3으로 승리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19]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2승 3패로 패한다. 1987년,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지만 해태에 2승 3패로 탈락한다. 1988년, 개막전에서 장호연은 무탈삼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다.[20] 이후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한다. 시즌 후에 두산 그룹은 우승을 못한 김성근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으려 했고, 김성근 감독도 사임하여 신용균 코치, 최주억 코치, 박상열 투수가 태평양으로 이적하게 된다.[21]
[편집]1989년 ~ 1994년
1989년, 제3대 이광환 감독이 취임했다. 그는 선수들 개개인에 개성과 책임감을 믿고 맡기는 '자율 야구'의 기치를 들었으나, 오히려 10연패, 11연패를 기록하고 그 해 6월 19일 시즌 중 교체 되었다.[22] 제4대 감독으로는 타격 인스트럭터였던[23] 이재우였다. 그는 1990년 대행 기용되어 1991년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 해 9월 9일 시즌 중에 교체되었다.[22]
제5대 감독은 최초의 선수 출신 감독으로 윤동균이 내정되었고,[23] 그는 남은 경기를 5할의 승률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24] 1992년, 본격적인 첫 시즌에 그는 김민호, 장원진, 안경현등의 신예들을 대거 발탁하여 5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25] 1993년에는 초반에는 5위에 머무르다가 9월부터 연승을 시작해 마지막 경기에서 LG에게 승리하며 3위로 6년만에 팀을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끈다.[25]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오히려 LG에게 1승 2패로 탈락한다.
1994년, 선발진은 김상진, 권명철, 강병규 등의 젊은 투수로 구성되었고 불펜에는 마무리 김경원, 노장 박철순등이 있었다. 타선에서도 김형석, 김상호의 중심 타선과 김민호를 중심으로 한 수비진이 있었다.[26] 개막전은 잠실 쌍방울 전이었으나 대통령이 시구를 하고 관전하는 것을 의식한 탓인지 선발 자원 4명을 투입하고도 패배한다.[27] 그리고 5월 중순 부터는 6,7위에 머물렀고 7위를 굳히는 형세가 되었다.[27] 이러한 부진의 이유는 장호연이 2승, 쌍방울에서 트레이드 해 데려온 강길룡이 1승만을 기록한 것도 있었다.[27] 그리고 9월 4일, 군산 쌍방울 전에서 1-2로 패배하자 윤동균 감독은 '몽둥이를 들겠다'고 했고 선수들은 이를 거부하자 윤동균 감독이 '맞기 싫은 선수들은 다 짐싸서 서울로 올라가라'라고 하였고 17명의 선수들은 이탈해 서울로 올라갔다.[28][29] 선수들 중 최고참인 박철순은 '윤 감독과 같이 옷을 벗겠다'라고 사태를 무마시키려 했다.[29] 결국 9월 14일, 윤동균 감독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고,[30] 박철순, 김상호, 김형석, 장호연, 강영수 등의 다섯 고참 선수들은 계약을 해지하기로 했다.[31] 그러나 그들은 팀 전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부진했던 강영수 만을 태평양으로 트레이드 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31] 그리고 남은 시즌은 최주억 코치가 감독직을 대행했다.[32]
[편집]김인식 감독시대; (1995년 ~ 2003년)
1995년, 제6대 감독인 김인식이 취임했다. 선수단 이탈 사건을 겪었으나 예상과 달리 연습생 출신의 김상진이 3경기 연속 완봉승[33]을 포함해 17승을 올렸고, 이어 권명철이 15승, 그리고 신인 이용호, 진필중은 김경원의 빈자리를 메워주었다.[34] 타선에서는 1번 타자이자 유격수인 연습생 출신 김민호, 고졸 신인 심정수는 21홈런으로 분발했다.[34] 시즌 구도는 서울 라이벌인 LG와 OB의 선두 다툼으로 흘러갔는데, LG가 8월 중순에 6경기차로 간격을 벌렸다.[34] 그러나, 이후 LG가 연패를 하자 OB는 6연승, 4연승을 거두고 9월 10일에는 처음으로 선두를 탈환한다.[34] 그리고 마지막 27경기에서 OB는 20승 7패를 기록하면서 LG에 반 경기차로 정규 시즌에서 우승한다.[34]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는 7차전에 롯데에게 4-1로 승리하며 사상 두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35]
1996년에는 최하위, 1997년에는 5위를 기록했다. 1998년, 이 해에는 10년 이상 중심 타선을 지켜오던 김상호, 김형석이 빠지게 된다.[36] 그 때문에 8월 말까지 꼴지를 기록했으나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의 활약에 힘입은 시즌 막판 연승으로 1경기차 4위에 오른다.[37]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LG에 2연패로 탈락하게 된다.
1999년 1월 5일, 구단 명칭을 현재의 '두산 베어스'로 바꾼다. 이 해 우즈의 활약과 3할 20홈런의 김동주, 3할3푼5리의 타율에 31홈런을 친 심정수의 활약으로 드림리그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만 한화에 4연패로 탈락한다.[38] 2000년, 우동수 트리오는 99홈런 308타점을 기록했으나 현대의 91승에 밀려 드림리그 성적은 2위였다.[39] 플레이오프에서 LG에게 4승 2패로 승리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한국시리즈에서는 1~3차전을 통틀어 3점 밖에 내지 못했으나 4~6차전을 모두 쓸어 담는다.[39] 하지만 7차전에서 톰 퀸란에게 연타석 홈런을 맞고 패배한다.[39]
2001년, 심정수는 선수협 사태로 심재학과 트레이드 되었으나 심재학은 그해 3할4푼4리에 24홈런 88타점을 기록해 심정수의 빈틈을 메운다.[40] 두산은 상당한 자금력의 삼성, 현대에 밀려 3위를 기록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2연승으로 일축한 뒤 플레이오프에서도 현대를 1패 후 3연승으로 가볍게 제치고,[41] 한국시리즈를 삼성과 맞붙는다.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은 갈베스의 구위에 밀려 1차전을 4-7로 패한다.[42] 그러나 다름 날 경기가 우천 취소가 되자, 활기를 다소 되찾은 두산은 장원진의 3점홈런으로 9-5로 2차전을 승리한다.[42] 잠실 3차전은 난타전이었으나 11-9로 승리한다.[42] 그리고 4차전, 두산은 우즈의 2점홈런으로 선취점을 얻었지만 2회초 삼성에게 타자 일순을 허용하여 8점을 내준다. 하지만 3회말, 두산은 김동주의 만루 홈런, 안경현의 백투백 홈런등으로 12점을 뽑아내고, 결국 18-11로 승리한다.[43] 이날 경기는 역대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점수, 최다 안타, 최다 점수차 역전 경기였다.[43] 하지만 4차전에서는 심기일전한 삼성에게 10점차로 대패한다.[43] 그리고 6차전, 1회초 삼성은 2점을 선취했으나 우즈의 150m 홈런으로 3-2로 역전시켰고, 다시 삼성이 3점을 냈지만 두산은 다시 동점을 만들어낸다.[43][44] 그리고 8회말에 심재학의 얕은 좌익수 플라이에 정수근이 홈으로 들어오며 6-5로 역전하기에 이른다.[44] 그리고 진필중이 마지막 타자 마해영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세번째 우승을 달성한다.[44] 한국시리즈 MVP는 시리즈에서만 7홈런을 기록한 우즈가 차지한다.
이후 FA, 트레이드로 팀 전력이 나빠지면서 2002년에는 5위, 2003년에는 7위를 기록했으며 2003년 시즌이 끝난 후 김인식 감독은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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